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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 13:20
[텍스트버전]
“65세가 된 어떤 조선인은 식욕이 없다면서도 밥 5사발을 비웠다.”
- 마리 다블뤼 (프랑스 신부)
19세기 조선에 도착한 프랑스인 다블뤼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사람은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 마리 다블뤼
그가 만난 조선인들의 먹성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죠.
조선인들의 식성에 대한 기록은 또 있습니다.
“서너 명이 앉으면 복숭아와 참외 20~25개가 없어지는 게 다반사다.”
- 이사벨라 비숍(영국 여행가)
“조선 사람이 밥 먹을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음식을 더 많이 먹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 윌리엄 그리피스(미국 동양학자)
밥그릇 위에 산을 이루고 있는 ‘고봉밥’은 서양인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보통 조선인들은 일본인의 2배를 먹는다.”
- 그리피스 존 (영국인 선교사)
“중국인과 일본인은 식사 때만 먹는데 조선인은 아무 때나 먹는 편이었다.”
- 헤세 바르텍 (오스트리아 여행가)
조선 선비들이 직접 남긴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인은 기이할 정도로 많이 먹었다. 가난뱅이들은 빚을 내서라도 실컷 먹어댔고 관료들은 하루 3끼 꼬박꼬박 술을 마셨다.”
- 조선 중기 선비 성현 <용재총화> 중
“조선 사람들이 먹는 건 천하제일인데 이는 유구(오키나와)에도 소문이 났다.”
-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 <성호사설>
<족계용하기>, <양용기>와 같은 민속 기록에는 성인 조선인 식사량이 한 끼에 7홉(420cc)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오늘날 식사량의 3배에 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양인은 조선인을 ‘대식가’라고 불렀습니다.
“대식가라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다.”
- 헤세 바르텍
“대식가고 힘이 아주 좋다.”
- 루이스 프로이스(포르투갈 선교사)
“대식가라는 표현은 틀렸습니다.”
-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조선인들의 이런 모습에는 먹을 게 없어 항상 배가 고팠던 당시 실정이 반영돼 있다고 분석합니다.
“음식이 많아 배불리 먹었다는 게 아니다. 먹을 게 부족했던 그땐 음식이 보이는 대로 입에 밀어 넣었다. 서양인 입장에서는 ‘많이 먹는다’고 볼 수 있었겠다.”
대식이 아니라 ‘폭식’이라는 설명입니다.
“영양이 불균형하면 허기짐이 올라온다. 이를 채우기 위해서 보이면 모두 먹어치웠다.”
- 식품 전문가 최낙언 씨
조선시대에는 곡물 농사를 많이 짓다 보니 먹을 거라곤 밥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탄수화물만 주로 섭취하니, 항상 배가 고팠다는 겁니다.
“끼니 대신 참외와 같은 과일을 많이 먹었다.”
- 한국학 대학원 주영하 교수
밥마저도 맘껏 먹지 못했습니다. 곡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른 음식으로 겨우 허기를 채웠습니다.
폭식을 해도 영양소가 충분하지 않다 보니 살도 찌지 않았습니다.
“쌀, 과일과 같은 탄수화물만 많이 먹는다고 해서 살이 될 순 없다. 영양소가 골고루 있어야 한다.”
- 식품 전문가 최낙언 씨
낯선 외국인에게 대식가로 비친 조선인 모습에는 배고팠던 민초들의 고통이 녹아 있습니다.
“많은 어머니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채워 넣는 것을 본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 보아 꽉 찼을 때 비로소 중지한다.”
- 마리 다블뤼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한 서양인이 바라본 ‘대식가’ 조선인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진 속 어머니의 무표정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지시나요?
기획 최재영, 권수연 / 그래픽 박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