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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08:41
인터넷 신문 기사보다가 보니 역사에 대한 기초 상식이 없는 댓글을 보고 올립니다.
일본 식민지가 되면 일본 국적이 되는 것입니다.
베르린 올림픽때 손기정 선수가 일본 국적으로 출전 한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만주군 소속도 일본국적이었기에 받아 준것입니다.
만주에서 독립군이 없어진 이유는 자유시 사건때문입니다. 백과 사전 복사본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C%A0%EC%8B%9C_%EC%B0%B8%EB%B3%8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v082mc331a6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어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 군대와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하얀 군대가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얀 군대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하얀 군대를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한국 독립군은 적군파에 가담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과 하얀 군대를 전멸시켰다.[1][2]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붉은 군대가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했다.
이 한인의병대는 일반적으로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인 무력군으로, 이만군대 사령관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 김덕보였고, 다반군대 사령관은 최니콜라이였다. 이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흑룡주정부가 극동공화국으로 강화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시로 집결했다.
대한독립군단의 조직
1920년 니콜라옙스크 사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일단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었다.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흑룡강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소련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군정서가 있었으며, 러시아 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와 고명수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중 이만 시로 들어간 이청천 부대는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아 연대장을 알게 되고, 박일리아는 소련 교관을 한국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자유대대는 고려공산당 중 이르쿠츠크(노령, 즉 러시아)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와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리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의회(임시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시빌리는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대해 계속 반항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리고리예프도 칼란다리시빌리에 투항하자, 칼란다리시빌리는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의용대는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와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자유시참변(흑하사변) 뒤 자유시에 남아있던 병력은 붉은 군대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자유시사변은 외부적으로 사할린의용군이 볼셰비키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이만으로 가지 않고 그냥 만주에 그냥 잠복하고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해 대기하였다.
지청천은 자유시까지 가서 자유시 참변을 겪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대부분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뿐만 아니라 상해파 공산당에까지 등을 돌렸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까지 적대시하였다.
평가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독립운동이 내, 외부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예다.
연표
참고자료
같이 보기
자유시 참변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는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1921년 3월 부대별 이동을 시작해 국경을 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남고 일부가 연해주까지 이동했다.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은 소련 적군(공산군) 소속 한인 부대장을 통해 군사훈련에 도움을 받는가 하면, 소련 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무기를 공급받는다. 이에 일제는 강력한 외교공세를 벌여 소련 정부에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혁명 후 내란 발생이 불안했던 소련은 1921년 6월 22일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해제의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했다. 독립군은 많은 희생자를 냈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만주로 되돌아왔다.
동의어 일서(逸曙) 다른 표기 언어 金弘壹
시대 | 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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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8년 | ||||||||||||
사망 | 1980년 | ||||||||||||
경력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제1군단장, 주중 대사, 타이베이 외교단장,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 ||||||||||||
유형 | 인물 | ||||||||||||
관련 사건 | 1·8일왕저격, 4·29상해의거 | ||||||||||||
직업 | 군인, 독립운동가, 정치가 | ||||||||||||
대표작 | 국방개론, 대륙의 분노 | ||||||||||||
성별 | 남 | ||||||||||||
분야 | 정치·법제/정치 | ||||||||||||
본관 | 김해(金海)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홍일(弘日), 호는 일서(逸曙). 별명은 최세평(崔世平), 중국식 이름은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평안북도 용천 출신. 중국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한 이후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고, 중국군의 요직을 거치기도 했다. 해방 후 귀국해서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아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정치가로도 활동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진건(振健)의 3남으로 일찍이 압록강을 건너 15세에 만주 봉천(奉天)에서 중국소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여, 18세에 정주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황해도 신천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재직 중 오산동문회가 항일단체로 몰려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구국일보사(救國日報社) 사장인 중국인 황개민(黃介民)의 도움으로 1920년구이저우[貴州]의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무관학교의 생도대장·교관·중대장·대대장, 1921년 독립군의용군단 대장, 1923년조선의용군 부사령관 등을 거치면서 일본군 소탕전에 적지않은 공적을 올렸다. 그러나 헤이허사변(黑河事變)으로 독립군이 참변을 겪은 데 큰 충격을 받고, 1926년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장개석(蔣介石)의 북벌에 직접 나선 적도 있으며, 1945년 5월 중국군 중장으로 승진될 때까지 근 20여년 간 항일전투는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는 동안 총사령부 병기감, 통계과장, 우쑹요새(吳淞要塞)의 사령부 참모장, 상해병공창 군기처 주임, 육해공군 총사령부 군기처장 등 중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장교로 있으면서, 김구(金九)의 뜻에 따라 한인애국단의 거사에 비밀작전 참모격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932년 이봉창(李奉昌)의 1·8일왕저격 및 윤봉길(尹奉吉)의 4·29상해의거용 폭탄을 김구의 요청으로 송식마(宋式驫)와 함께 제작하였다. 이봉창의 거사가 일왕 히로히토(裕仁)를 죽이지는 못하였지만, 윤봉길의 대의거는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시라카와(白川義則)를 비롯한 10여 명의 일본 요인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게 하였다. 중국군 상해병공창 주임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19로군 후방 정보국장을 겸임하며 그가 꾀한 항일독립운동에 일본 해군기함 이즈모호(出雲號)의 폭파와 일본군 무기창고 폭파계획도 아울러 진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1937년 동로군(東路軍)사령부 참모를 비롯하여 집단군 참모처장·사단장, 병단(兵團) 참모장, 청년군사령부 부참모장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1943년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45년 6월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중국 동북보안사령장관부(東北保安司令長官部)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광복 당시 만주 일대에 거류하는 한국인 동포의 보호와 본국송환에 진력하였고, 1946년 말에는 미중앙정보단(CIG)의 비밀 업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1947년 5월 중국 국방부·정치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8월 귀국하였다. 1948년 육군 준장으로 임명되어, 그해 12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선에서 밀려오는 적을 1주일간 방어한 뒤,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탈환작전에 이르기까지 전공을 세우고,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군간부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1951년 10월 예편된 뒤 주중 대사가 되었고, 타이베이 외교단장(臺北外交團長)으로 활약하다가 10년 만에 귀국하여 1961년5·16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고문과 군정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적극 반대, 박정희(朴正熙)와 결별하고, 1967년 정계에 투신하여 제7대 국회의원이 된 뒤, 1970년신민당 전당대회의장을 거쳐, 1971년유진산(柳珍山)이 한때 물러난 뒤에 당수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 해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당내로는 김대중(金大中)과 제휴하여 1971년신민당 당수가 되었으나, 당내 양파가 각각 전당대회를 열어 1당 2당수의 내분을 겪은 뒤, 1972년 9월 당수직을 사임하였다. 박정희의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만년에는 광복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82세에 사망하였다. 저서 저서로는 『국방개론』(고려서적, 1949), 『대륙의 분노』(문조사, 1972)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2년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으며, 을지무공·태극무공·청조근정 등의 훈장도 수여되었다. 중국 정부로부터도 충근(忠勤)·대수운마(大綬雲摩)·대수경성(大綬景星) 등의 훈장을 받았다.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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