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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15:24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모습이 흥미로워
혹시 과거의 관객들과 지금의 관객들의 영화를 대하는 시선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
변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화제작이 개봉하면, 영화에 대해 열성적으로 이야기하고 분석하는 관객들이 많아졌다. 열성적인 영화팬이 늘어난 건 대단히 긍정적인 변화다. 반면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반응을 쏟아낼 때가 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쩌면 꼰대 같은 소리일 수도 있는데, 내가 10~20대였을 때는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도 영화가 재미없으면 극장에서 자다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들리긴 했지만, 나는 아무리 재미가 없어도 자고 나온 적은 없다. (웃음)
과거의 관객들은 영화를 낭만적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영화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 같다. (웃음) 영화가 재미가 있다/없다는 개개인의 취향 차이라고 보는데, 요즘은 자신이 본 영화가 재미없으면 극단적으로 폐기처분할 쓰레기 취급을 하는 경우도 있더라.
예전에는 영화가 특정 개봉관 한 곳에서만 상영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곳까지 찾아가서 표 끊고 봐야했다. 쉽게 매진되는 인기작을 보려면 한참을 기다려서 보거나 암표를 살 수밖에 없어서, 내가 고른 작품에 대해 애정이 생기곤 했었는데. 요즘은 영화를 보는 채널이 다양해졌고, 작품의 수가 많아서 그냥 소비가 되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가까운 비디오 대여점에서 안 갖다 놓는 영화가 있으면 수소문해서 테이프를 겨우 구한 뒤, 비닐봉지에 넣어서 집에 갈 때 무척 설레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감정을 느끼기 힘들어졌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들은 어둡고 파괴적이라는 이야기들을 듣는데, 한창 영화들을 보러 다닐 때도 그런 작품들을 많이 봤나?
그런 영화들을 좋아했다. (웃음) 한창 볼 때는 비디오 대여점에 있는 영화들을 거의 다 봤다. VHS 테이프로 나온 영화들 말고, 베타 테이프로 나온 영화들까지 다 찾아봤을 정도니. 감수성이 예민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홍콩 느와르 붐이 있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특히 인기였다. 또 그때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들이 한창 꽃피울 시기여서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세계> 개봉 때 인터뷰에서도 인간의 선악에 관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인간이 본래 악하다는 성악설을 믿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된 계기가 있다면?
중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고민을 했다. (웃음) 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이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라고 하신 걸 듣고서, 인간은 어려서부터 수없이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배우는데 왜 장난으로 개구리를 죽일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나쁜 짓인걸 알면서도 재미 삼아 그런 짓을 하고, 또 죄책감도 별로 안 갖는 것에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저녁 9시 뉴스데스크를 즐겨 보게 됐다. (웃음)
사건 사고 뉴스 말인가?
버라이어티하잖나. 인간의 밑바닥 본성들을 보면서 성악설에 대한 믿음을 점점 굳히게 된 것 같다.
창작자로서 그런 악인들에게 어떤 매력을 느끼나?
인간이 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본성을 억누르고 살 수 있는 건 교육과 법, 제도 같은 사회 시스템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가 안 되는 건 사람의 이기심 때문이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본성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절대적인 극한 상황 속에선 인간의 밑바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 때에도 끝까지 정의와 선을 지키는 사람은 성인 반열에 오르는 것이고.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본인 스스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캐릭터를 만들 때 그런 변화 과정과 뭔가가 벗겨지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본인의 각본, 연출작 중에서 사랑하는 악인이 있다면?
나는 내 캐릭터들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절대악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김광일(브이아이피), 장경철(악마를 보았다) 정도고. (웃음) 그 외의 다른 인물들은 절대악, 절대선으로 나누지 못한다. (악한 짓을 하더라도) 그들이 만약 다른 상황에 처했다면 안 그랬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내 모든 캐릭터들에 애정을 갖고 있어서 시리즈물에 집착하는 것 같다. 한 작품으로 끝내기가 아쉬워서 말이다. (웃음)
다른 감독 영화에서 애정하는 캐릭터를 꼽는다면?
예전에도 언급한 적 있는데,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돈 콜레오네’를 좋아한다. 마피아 보스이고 나쁜 사람이지만, 깨어 있는 사람이면서 인자함과 책임감, 카리스마도 있는, 모두가 동경할 만한 멋진 요소를 다 가진 캐릭터다.
그 반대의 개념에서 <품행제로>의 류승범 캐릭터가 쌩양아치 같아서 좋아한다. (웃음) 또 안쓰러운 인물이라서 맘에 가는 캐릭터가 <무간도>와 <동사서독>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캐릭터들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때 이야기와 캐릭터, 둘 중 어느 쪽에 더 신경을 쓰고 작업을 하나?
우선 이야기를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캐릭터를 만든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서든 팔딱거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야기에는 좀 맞지 않더라도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편이다. 예외가 있다면 <브이아이피>였다. 그 영화는 캐릭터보다는 철저하게 이야기 중심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배우 분들에게도 사전에 이야기해뒀다. 캐릭터가 돋보이게 되면 관객들이 그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해서 응원하게 될 텐데, <브이아이피>는 사람들이 모래를 씹듯이 건조하게 봐줬으면 했다.
<브이아이피>는 길게 구상한 이야기 중 일부만을 떼어서 만들었다던데.
영화에서 보이는 이야기는 작지만, 그것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스케일은 크다. 그래서 첩보물인 줄 알고 보러 갔더니 소소한 이야기더라... 하는 식의 반응도 있었다. 규모를 충분히 크게 가져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고 또 여건상 힘들어서 작게 풀었다.
시나리오 재밌는데 왜 투자가 안 되지?
<마녀>는 속편에 대한 암시도 하고, 영어로는 부제까지 있어서(The Witch : Part 1. The Subversion) 시리즈물로 인식되고 있다. 큰 스토리로 구상한 것에서 일부만 담은 건가?
투자자들이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서는 ‘프리퀄 같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본편을 찍겠다고 한다면 그 예산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여주인공 원탑 영화이고 시각효과도 많이 쓰이는데 본격적인 스토리를 다루면 리스크가 더 클 거라고 말이다.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든 시작하려면 지금의 스토리가 맞고, 캐릭터만이라도 살아남으면 성공이다. 그 다음부터는 본편을 만들 수 있으니 이렇게 출발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에 들어간 제작비는 60억 원 이상이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60억 원짜리 상업영화에 여성 원톱을 원하지 않는다. 더욱이 신인 배우를 기용한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 거다.
그런 이유로 제작이 계속 지연이 되었다. 결국 (현 투자사) 워너브라더스는 “그게 뭐가 문젠데?”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할리우드쪽 회사다보니 그 정도 예산이면 자기들은 오케이라면서. 워너 본사 쪽 임원들은 <마녀>의 시나리오가 재밌다면서 왜 투자가 안 됐는지 자신들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더라. 그쪽 입장에선 60억 원이 작은 예산일수도 있으니.
그렇게 해서 시리즈 1편으로 시작은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개봉 성적이 나와 봐야 안다. 워너 본사에서 리메이크를 할 거란 얘기도 있어서 할리우드에서 시리즈화가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음 편을 찍는다면 60억으로는 절대 못 찍으니까. 속편에 관해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브이아이피>에 이어 워너와는 두 번째로 작업했다. 국내 투자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워너가 작품의 소재에 대해 덜 까다롭다. 국내 투자사들은 좀 더 보수적이다. 워너는 본사가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이고 전 세계적으로 로컬 제작을 많이 하니까, 보다 다양한 소재를 선호하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투자사들은 한국 내에서 통하는 걸 원하는 경향이 크다.
<마녀> 같은 영화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은 그런 거 안 봐. 마니아나 애들이나 좋아한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야기 자체는 어렵지 않고 또 익숙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관객들은 리얼한 한국영화를 선호하니까 말이다. 반면에 할리우드 영화로는 마블 작품들이 인기고 리얼한 쪽은 많이 좋아하질 않는다. 관객들이 비현실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관대하지만, 한국영화를 볼 때는 가혹할 정도로 리얼리즘에 집착하는 것 같다. 할리우드처럼 영화를 만들면 ‘어색하다, 말이 안 된다’ 라고 하고. 때문에 투자사들도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먹힐만한 것만 하려는 것 같다.
<마녀>는 제작사(㈜영화사 금월)를 설립하고 만든 두 번째 영화다. 감독이 제작까지 겸했을 때 장점이 있다면?
작품 선택을 할 때 좀 더 자유롭다는 점. <마녀> 같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면 보통 다른 제작자 분들은 하지 말라고 말린다. 왜냐면 리스크가 크니까. 한국영화 기준에서는 정말 리스크가 큰 영화다. 여성 원탑에 그것도 신인 배우. 이야기도 안 리얼해. (웃음) 그러니 제작자가 내 걱정을 해주면서 하지 말라고 말리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만들려면 그렇게 밀어붙일 수 있는 제작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대호>가 140억 짜리 영화였는데 쫄딱 망했다. 그럴 경우 감독 입장에서 제작자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런 책임도 내가 다 지는 게 속편하다. 또 내가 쓴 시나리오를 다른 감독들이나 신인에게 맡기려고 하면 본진이 하나 있어야겠다 싶어서 제작사를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