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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4 20:40
일본야동을 즐겨 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엉뚱하다 싶겠지만 절대 과대망상이 아닌 명성황후? 와의 연관성이 생각나서 적어봄
횐님들 다들 아시다 시피
일본야동의 재미가 엽기적이고 과장되며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들이 대부분
마사지물
상사와의 출장물
온천물
회식후 술취한여직원 모텔물
옆집에 이사온 새댁 강간물
시골놀러온 처녀 시골논네들이 돌아가며 따먹는물
여자하나 불러다 이유없이 무조건 돌아가며 질싸 얼싸하는물
시아버지 며느리 강간물
거만한 여상사 부하직원들이 돌아가며 강간하는물 등인데
여기서 마지막 거만한 여상사물을 보며 엉뚱하게도 본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생각남
명성황후의 죽음을 자세하게 아는분은 아시고 모르는분은 모르겠지만
대략 설명을 드린다면
사사건건 일본정부에 평소에 반기를 들던 명성황후를
일본정부에서 부터 하달된 일명 "여우사냥"이라는 명목으로 명성황후 시해를 계획함
이에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가 머무는곳에 들이닥침 (소수의 한국인들이 길안내를 함)
이를 말리는 궁중시녀등 남녀 가릴거 없이 팔다리 다 잘라버리고 죽여버림(실제 이렇게 기록물에 나옴)
명성황후를 찾아내서 마당으로 끌고나와 칼로 복부등을 찌른상태로
낭인들이 돌아가며 명성황후를 강간함
그 당시를 목격한 러시아공사쪽 서류에도 기록되어있음.
(낭인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뽀얀피부의 황후를 일본자객들이 돌아가며 강간을했다고 나옴)
강간후 황후의 국부에서 부터 일본도를 찔러넣어 살해함
살해한 명성황후시신을 기름을 부어 태워버림
이 장면을 러시아공사 등이 목격해서 위와 같이 추후 진술도 함
당연히 일본역사서에도 이런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
일본 박물관에는 지금도 명성황후를 시해할때 쓴칼이라며 전시도 되어있는 상태
칼에 "이칼로 간악한여우를 죽이다" 라고 써있음
아는분은 아실테고 몰랐던 분들은 좀 충격을 받았을수도 있는데
다른나라 같으면 상상도 할수없는
어찌보면 일본놈들은 그저 상상이 아니라 평소에 기회가 되고 그 틈만 보인다면
언제든 이러한 엽기적인 일도 아무렇지 않게 벌일수 있다는걸 알아야 한다는 거다
과대상상 허무맹랑 이라 할지 몰라도 일본의 야동스토리를 보며 문득 생각이나 몇자 적어봄
누가 잘 모르는지 모르겠네요 ㅋ~
버거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분이 살아 생전에 추존이 되었다면 명성황후라고 불러드리는 게 맞죠
허나~ 을미사변 이후, 폐서인이 되었다는 것을 아시는지....
그리고 이후에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민씨를 다시 빈으로 봉합니다~(1898 대한제국 선포령 1년후)
아래의 자료는 조선왕조 고종실록 (40권중 1898년 제국선포령 발췌 일부분입니다)
이후 왕궁에서는 빈이 된 '민씨'를 명성황후라고 불렀지만 실상 대놓고 부르진 못했습니다
귀인 엄씨의 등장의 원인도 있었구요~(차기 황후 자리를 실세 엄씨를 눈치를 봐서 못 부르고 있었음)
서설은 접어두고서라도
당시에 명성황후라고 추존이 되었더라도 그렇게 부를 수가 원래 없는것이 맞는 이유가
추존 되었던 사람이 명성황후 뿐만이 아니였다는 거
즉, 부르지도 못하는 명성황후 말고도 추존된 사람들이 워낙 많았습니다
대원군도 대원왕으로 추존되었고 그런식으로 조선의 왕들 모두가 추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조대왕을 추존한 '선황제' 라고 부르나요???? 정조라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순조를 '숙황제'라고 부르나요???
마찬가지입니다...
잘 아시고 말씀하시길~
세종 대왕의 어머니 이신 원경왕후 민씨, 숙종이 두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자꾸만 지칭하시는데....
이처럼 왕후를 비 라고 지칭하는게 낮은 표현은 아니라는 점(후비, 계비 -왕후들에 대한 표현)
cf. 물론 황후를 비라고 지칭하는건 낮은 표현은 맞지만...명성황후를 황후였다고 보기엔 추존이어서...
암튼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를 몰라서 가만히 있으시는 거 아닙니다~
다만 명성황후라는 표현은 사리에 맞지 않지만....그분이 일제의 만행에 돌아가셨기에
그냥 공감하고 넘어가는 것일뿐
명성왕후 민씨라는 표현만이 그나마 맞는 표현이라고 하겠네요
어디서 나오긴요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그리고 우리역사넷 에 나와 있는것이죠
명성왕후 이렇게만 쓰지 않는다니까요
명성왕후 김씨 , 원경왕후 민씨 이런식으로 씁니다
님은 명성이라는 호가 왕비 또는 황후의 지칭되는 독자적 이름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 나중에 부르는 이름에 지나지 않음
(물론 조선왕조실록에도 명성황후라고 지칭해서 씁니다만...궁내의 기록에 한정되어 있었고
또한 같은 님이 구분을 못하다고 하는것도 웃긴게
그렇다면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 는 같은 정순왕후인데
님의 논리대로라면 어떻게 구분하나요????)
황후라는 표현이 죽은 후에 추존을 한것인데~ 사후 추존을 한 사람을 추존명 그대로 부른다면
현 부르고 있는 우리가 아는 모든 인사들의 명칭이 죄다 바뀌어야 한다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정말 웃기게 알고 있는것이
비 라는 표현이 예전에 왕의 부인들 비빈 이라는 표현에서 나와서
왕후에게 못 쓰는 표현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왕후 에게 원래 쓰는 표현이 비 입니다.....
후궁에게 쓰는 표현이 빈이구요~
그래서 간택령 받아서 왕비가 되는 걸 계비,
후궁(사저에서 결혼 후 자식을 낳아서 온 경우도 이것에 해당)에서 자손을 낳아서 왕비가 되는 걸 후비라고 하죠~
님 논리대로 한다면 당시 대한제국 선포령 당시에 추존한 이름 꽤 나 많아요~
첫번째로 대원군을 대원왕으로 추존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흥선 대원군을 흥선 대원왕이라고 부르나요???
조선 22대 정조를 선황제로 추존했다고...
우리고 선황제라고 부르나요??
이와 이치가 같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도 명성왕후 민씨(민비) 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워낙 많이 갈리고 있고
아직도 저울질 외교가 국가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어서
결론을 못 내렸을뿐 .... (역사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가는 게 아닌 여러가지 논지가 존재할 수 있는 학문이기에)
왜 일본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황제국가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시해사건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배웠던 것 처럼 그런 모습이 아니였는지는
역사를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알텐데~~
세상은 완전 식민사관에 물든 사람 또는....
'해방전후 한국사의 이해' 라는 책만이 진실이양 믿는
50대 86 학번 운동권의 지식의 한계성이
이런 논리를 만들었죠
웃긴건 매국신문들을 동원해서 날조 했다는데~
그 실상 독립신문(을미사변이 창간의 원인이 됨) 과 황성신문(대한제국 선포가 창간 원인) 에서
을미사변과 민비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하는 지 만 봐도~
날조인지 선동인지 알텐데~ 참 어이가 없을뿐
그게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의 운동권 민주화 세력의 한계이기는 하겠지만 ㅋ
??? 자국 이익 중심???
역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
' 我 와 非我 의 鬪爭 ' 이라고 하셨고 그에도 중심을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역사 왜곡하는 중국 일본을 보면서 ... 그에 대한 피해를 그렇게 입고 있으면서
자국 이익 자국 이익하며 매국노 운운하는 건~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럴수 있나 싶은데~
하긴~~그쪽 성향이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은데~
제동이형~ 국이 형~~ 미향이 누나 미애 누나 골찬이 형 쪽 계열이면
뭐~~그렇게 내로남불이 passive이죠 ㅋ
아니요~ 그렇게 부르면 안됩니다
을미사변 이후 명성왕후 민씨는 폐서인 됩니다. 그리고 1898년 대한제국 선포령 1년 이후 특서인으로
빈으로 다시 봉해지죠~당시에 이미 그 특서인 됨과 동시에 궁내에서는 명성왕후 민씨를
님들 처럼 명성황후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대놓고 부르진 못했음. 차기에 황후 자리를 노리던 엄귀인 때문에...)
그러나...그렇게 되면.... 당시에 추존된 사람들이 그것만이 아니였기에
대원군은 대원왕으로 추존, 선대의 왕들은 모두다 높임 황제로 추존됩니다
정조대왕은 선황제 로
순조대왕은 숙황제 로
우리가 지금 정조대왕을 선황제라고 부르나요?????
그래서 가장 정확한 표현은 명성왕후 민씨가 가장 맞는 표현입니다.
국채보상운동 당시에 대한민국의 일년 예산이 1100만원 이었는데~
한국이 일본에게 가지고 있던 차관이 1300만엔 (당시의 원화대 엔의 비율이 1:2) 이었기에
실상 2600만원의 빚이 있었던 것
즉.... 일년의 예산의 두배가 넘는 차관 빚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2600만원 일본의 차관 도입은 왕실의 사치품을 사기 위한 조선 왕실의 빚이 90%이상이었고
그것에는 고종의 '벤츠 2대' 민비의 '각종 장식품 및 치장거리' 가 다수였다는 건
황현의 '매천야록' 만 보더라도 나오는데 ...
이를 두고 식민사관 운운거리는 건 어이가 없는것
cf. 물론 황현의 '매천야록'이 자신의 이전세대에 대한것은
전언문을 토대로 개인의 감정을 쓴 것이기에 100% 사실에 기반한것이 아닐수는 있는데
매천야록 말고도
유길준의 '서유견문록'에도 조선이 공화제 국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들어
말도 안되는 빚을 만들어 내는 왕실이라는 내용이 있는것 보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음
역사 잘 모르시죠? 당시에 조선(대한제국)의 형세가 어땠는지
일본입장에서는 민비가 어떤 존재였는지...잘 모르시면 일본입장에서는 반겨야 한다고 생각하겠죠
(절대 그쪽 지지층 40대 중후반 그리고 586운동권 ㅋ)
1866년 병인양요 이후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국시로 삼고
모든 해외문명에 이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고종친정 1873년)
그러다가 일본의 간악한 계략(운요호 사건)에 빠져서 1876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이 되죠~
문제는 그 이후에요 흥선대원군의 실각이후 정권을 실세로 자리잡은 민비가
자신의 사람들을 앉히고 임오군란 갑신정변이라는 크나큰 두개의 사건을 통해서
조선의 개혁개방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것이 아닌
당시의 열강들(독일 미국 영국 청나라 일본 등등) 을 저울질해서 거기서 나오는 이권을 통하여
자신의 치장품과 사치품 소비에 매진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숱함(진령군 사건 참고)
당시의 그러한 저울질이 실상 나라의 부강함을 위한 발모였다면 분명 사학자들의 평가는 후했을것이나
아까도 위에 말했듯 위정척사운동가 였던 황현의 '매천야록' 과 개화파 였던 유길준 '서유견문록'에
민비에 대한 평가는 이미 충분히 나와있고(척사파와 개화파 양쪽에서 안좋은 평가임)
어떻게 보면 그 이후의 한반도에서 일어난 청일전쟁도 민비가 일으킨 것과 다름이 없음.
민비의 부정적 평가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1. 삼정의 문란 외척의 발호를 막았던 흥선대원군의 그나마의 개혁책을 다시 원점을 돌림
2. 임오군란 갑신정변때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실상 궁궐 내의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게 됨(한성조약-민영휘 민영환주도)
3. 내탕고의 돈을 마음대로 유용
(조선을 멋진나라라고 책을 썼다고 하여 언더우드에게 결혼 축의금으로 100만냥 선물 - 당시 조선의 1년 예산 1100만냥)
(민영익 치료 잘했다고 알렌에게 10만냥 선물 - 뭐 이건 가족 치료 관련이니 이해 가능은 하기는 한데...그걸 내탕고에서 지급한건..ㅡ.ㅡ;;)
4. 능력도 없는 척족(민영휘 민겸호)에게 군대 통솔하게 하여 실상 동학농민군(민란)도 진압을 못하는 상황을 연출
5. 사치품 관련 은 더 이상 기술 안하겠음....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주류 사학자가 아닌 민족사학자들 중에서는
당시에 손탁부인 , 알렌의 부인, 비숍 등등에 진술과 기록에 의거 그녀를 의인으로 묘사함
(그들이 민비에 대한 평가가 후한건 어마어마하게 뇌물이나 이런것을 받아 먹었기 때문
손탁의 경우 진령군 사건과 깊숙이 개입되어 있고, 알렌의 부인은 왕실의 주치의 였고 비숍 역시도 언더우드와 관련이 되어 있는 인물)
또한 민족사학자 들 중 민비를 명성황후이다 라며 추앙하는 쪽은 프랑스 르땅지나 미국 외교관 기술을 따르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정치적 로비를 통해서 얻어진 결과라고 보는게 맞을듯 보이고
아울러 만약 진정하게 명성황후로 인정받는 케이스 였다면
죽고나서 사후에 대대로 이야기가 나오던가 또는 1993년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본부때
민비가 아닌 명성황후에 대한 반박이 어느정도 나와야 하는데....하나도 나오지 않고....
좌파 정부가 들어선 시점부터 감성팔이 오지게 들어간
조수미 " 나가거든 " 을 시작으로 그놈의 명성황후로의 역사적 신분 세탁에 들어가고
웃긴건...거기에 온 국민이 동조하기 시작한다는것이었음
당시 정권의 취지로는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없애기 위해 또다른 굴욕적 외교라고 평가받는
신어업협정(1996년) 체결로 인한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이는 반일 감정과 그 맥을 같이 했음....
가장 웃긴건 민씨 일족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들이 경술국치는 물론 조선 말기부터 앞장서서 일반 백성들을 수탈했다는 사실인데...
경술국치 이후에는 친일파 중에서도 가장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쪽이
여흥민씨 중에서도 민비 세력들이었음에도(민영휘~원래 이름은 민영준인데 수탈을 심하게 해서 암살 당할까봐 이름을 개명함)
그 일족을 반일을 할 영도 세력이라고 받들어 모시는 골빈 어떤 세력들을 보건데....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할뿐 ㅋ
가짜 정보? 황현의 '매천야록' 과 유길준의 '서유견문록'이 가짜 정보임???
돌씽 아자씨 정신 차리세요~
요즘 애들이 녹록치 않아요~
진중권을 위시한 586 당신들이 대학 다닐때야 그 시대 사람들이 덜 배우고 골빈 정의감이 도취되어서~
당신네들의 그 논리도 없고 감성팔이 하는 역사관에 동조했지만~
요즘 애들은 찾아보는것도 많고 SNS 로 소통하기에 뭐가 진실인지 금방 알고 빨리 습득한다는거
하긴~~~ 명백하게 소련과 북한이 남침을 한 한국전쟁을
미국의 북침 한국전쟁이라고 이야기 하는 황현필 한국사를 정석으로 알고 있는 당신네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쇠귀에 경읽기지~~~
가서 우리민족 끼리나 실컷 보슈~~~ 돌씽 할배요~ ㅋㅋㅋ
타국이 껴 있으면 자문화 중심적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건가요?? 그런건가요?
그런식이면 중국의 동북공정도 그 애들 입장에서는 당시의 한국이 껴 있는 것이니
자문화 중심적으로 볼때 옳은 것으로 봐야 하나요??
그리고 식민사관으로 썼다는 데
(제가 기술한 내용은 학창시절 배웠던 내용, 대학때 따로 공부한 내용, 최근에 한국사 검정 시험
보면서 다시 배웠던 내용들에다가 국립한국사연구원 그리고 우리역사넷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과 제가 나중에 읽고 싶어서 읽었던 황현의 매천야록 그리고 유길준의 서유견문록 까지 탐독하고 쓴것인데....)
어떤게 식민사관의 지식이고...어떤 용어가 식민사관의 용어인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빤스~~런 하지 마시고~~~
79년생 형님이시면 형님 답게 뭐가 문젠지 잘잘못을 밝혀보자는 거죠
논리적으로도 사실로도 님의 주장하시는 바가 맞다면......저도 수긍을 하겠습니다
식민사관이 아닌 입장에서 1866년 병인양요 부터 1910년 경술국치 까지의 일들을 한번 정리해 주세요
뿐만 아니라 명성왕후 민씨에 관한 이야기도 덧붙여 기술해 주셨으면 합니다
웃긴건 만약 강간설이 당시의 사실이었다면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서 을미사변에 국모의 강간을 하나도
쓰지 않았을리가 없는데...
또한, 지금 강간설이 나오는 게 김진명 작가의 소설 '여우사냥' ,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 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내용인데
이게 지금의 학자들에게서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아무도 이야기 안하고(서울대 신용하교수 등)
그저 반일 프레임과 맥을 같이 해서 엄청나게 퍼지고 있고 이를 두고 김용옥과 기타 반일 좌파 매체에서 선동 조장하는게 대다수인데...
에조 보고서(정식 경로로 일본 보고- 이것도 꾸며낸것이라 하고 있음)에 따르면
(당시에 국부노출은 실상 강간이 아닌 임신여부를 알기위한 검사로 보는 이도 있음)
" 무리들이 왕비를 끌고 나가 총검으로 가슴팍을 두세군데 깊게 찔렀고 , 그 창상의 결과로 죽은 후
사체의 국부를 노출시키고 불에 태워 소각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일본의 극우파 역사학자 야마베 켄타로(80년대)가 일방적이게
"사체의 국부를 노출시키다 " 를 " 죽인 후 능욕하였다 " 로 바꾸고....
이것을 가지고 김진명 작가(90~2000년대)는 자신의 소설에 상상력을 더해
" 죽기전 이미 강간을 하고 , 죽인 후 능욕하였다 " 로 첨부~
이것을 진실로 알고 있으니....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