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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5 14:08
일본이 가장 무서워한 조선인 홍범도 장군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정식교과에 없는 논거??? ㅋ~
이미 아래에 돌팔이님의 댓글에 내용(러시아측 자료, 일본측 자료, 우리나라 자료) 남겼으니
아래 내용 참고 하시고....
그럼 하나만 묻죠~
님 말대로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서 대한독립군단 섬멸과 전~~~~~~~~~~혀 관계 없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자유시 참변(1921년 6월) 이후
항일무장 항쟁은 계속 이어 졌고.....우리가 아는 한국 독립군(지청천) 조선혁명군(양세봉)이라던지
나아가 의열단(김원봉)이라던지 한국 광복군(지청천) 이라던지....대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동료들이 끝까지 투쟁하는데.....
이런 항일 무장 항쟁에서 홍범도의 이름은 왜 언급이 안될까요????
자유시 참변(1921년)이후 홍범도의 기록은
레닌시대 자유대대 극동지부 명예장군, 연해주 콜호친 지역 코민테른 대표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왜 일까요?
자유시 참변이후에 우리나라가 독립을 한건가요???
왜 그는 항일 독립 운동을 자유시 참변이후에 완~~~~~~~~~~~~전히 멈췄을까요?
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역사에서 숨길수 있는 건 없어요
계속 논의 되어야죠....무조건 적으로 자유시 참변에서 홍범도가 주도해서 일으켰다는 논지는 우스운 일이고
그렇다구 해서 자유시 참변에서 홍범도가 자유로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거
이미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일부(극우파나 뉴라이트 계열 아님)에서는
홍범도가 이미 어느정도 자유대대(향후 적군)에게 일정선의 대우를 보장받고 자유시로 무장해제하고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그의 자유시 참변 이후의 행적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역사에서는 이미 계속 논의되고 논의 되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거나 우리가 몰랐던 진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혁명이었으며......그 일은 정당했다고 하는 것 처럼....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서 대한독립군단 섬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는 것처럼...
한쪽으로 기운~~ 생각도 없다는 의견입니다....
인성조님께 여쭈어 보고 싶네요
님이 항일독립운동 가라면........
아직도 조국이 독립 되지 못했는데.....자신들의 동료는 아직도 타국에서 열심히 항일무장운동하고 있는데....
자신은 타국에서 명예장군 직함 받고.... 의회대표 직함 받으며.......
살고 있다는 거.......
자유시 참변과 관련이 없다고 하는데....
과연....그가 자유시로 들어간 이유는.....뭐일까요??
다른 동료들과 다른 스탠스를 취한건 무슨 이유일까요??
님이 보기엔 자유시 참변이후 홍범도 장군님께서 살던 러시아에서는
대한민국의 독립이 이미 이루어졌었나 봅니다 ㅋㅋㅋㅋㅋ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의 유명한 항일 독립군 장군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다만....자유시 참변 당시의 그의 스탠스가 이상했고....
또한.....자유시 참변 이후의 그의 스탠스 역시 이상했기에......
그가 자유시 코민테른의 최후 통첩을 받고 자유시에 들어간 바로 그날 새벽.....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고 나머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장군들은
자결을 하거나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홍범도 장군과 안무 장군 만은....멀쩡했습니다...
왜일까요??
지청천 장군은 쫒겨 났습니다...왜 일까요???
홍범도 장군은 자유대대 극동지부 대대장 직함을 받았고
레닌시대에는 자유대대 극동지부 명예장군 직함도 받았으면
연해주 콜호친 지역의 코민테른(지금의 의회)의 대표를 하사 받았습니다
당연히 볼세비키(공산당) 당의 당원이 되었구요....
자~~ 자유시 참변이후에...님이 독립운동가라면....
조국이 독립이 되지 않은 상황인데.....
다른 자신의 동료들이 이미 만주나 연해주 중국 본토로 들어가서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계속 하는(지청천, 김원봉, 양세봉 등등)
상황에서 자신은 러시아의 의회 대표 , 러시아의 명예장군 직함을 받고
그냥 안주하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또한 1930년대 항일 무장 전선에서 홍범도의 이름은 아예 언급 조차 안됩니다...
왜 일까요?
역시 자유시참변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참변이 있기전에 홍범도장군의 부대는 무장해제하고 여기저기 흝어져있었다는 러시아기록이 있었다
자~~ 좀만 머리라는 걸 써보면 알수있는 부분이야
갑자기 우리나라에 조선족반군들이 몇백몇천단위로 총칼로 무장한채 살려달라고 넘어왔는데
"어이쿠 힘드셨겠네요 스스로의 몸은 지키셔야 할테니 그대로 무장하고 계세요"
라고 하겠냐?? 나라가 아무리 개막장이라도 그런 병신짓은 안해
바로 무장해제 시키고 뿔뿔히 흝어놓고선 조사하고 신병처리 문제로 골머리 썩어야 하는게 당연한거야
까딱 잘못하면 내란세력이고 여차하면 마적단 하기 딱좋은 집단이거든
뇌피셜 핑핑 돌려서 다른 독립군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그때 죽은 무장세력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없어 진짜 독립군이였는지 그냥 마적단이였는지 알수가 없는 걸
홍범도가 빨갱이라서 같은 독립군을 학살했다고 소설을 써놨드만 기록도 없는 걸 믿는 지능들도 참....
소설을 믿는다?? ㅋ~
그럼 당신이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누가 인정을 하는 데요??
당신이 하도 소설 이라고 이야기 하니 그렇다면.... fact만 체크 해 보죠....
1. 간도 참변으로 독립군들의 근거지 약화, 당시 러시아는 백군(제정 자유주의세력) 과 적군(공화정 사회주의세력)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던 시기
2. 당시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백군이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적군이 독립군단에게 지원을 해줄것이라는 생각에 적군의 근거지인 자유시 근처로 이동 및 자유시 중심지 200km 근방에 진영구축
3. 자유시 근방에서 테러를 일삼고, 자신들이 이용당할 것이라는 적군의 위험성을 인지한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군단장 김좌진(청산리 대첩)장군이
홍범도 및 여타 장군들에게 자유시 합류를 만류.
4. 홍범도는 예전 같이 독립군 생활을 했던 오하묵이 고려공산당내 자유대대(일명: 빨치산-이르쿠츠크파) 를 만들어 같이 반일전쟁노선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에 자신의 휘하의 700여명을 이끌고 자유시 안으로 들어옴
5. 김좌진 장군은 자신이 겪었던 신한촌(연해주)내에서 소련 적군의 테러를 목격했던 것을 피력하며, 나머지 독립군들에게 간도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홍범도가 자유시에 안전하게 들어가서 큰 문제가 없는 것을 보고, 우왕좌왕 하는 독립군들을 보고 각자도생해야 할것으로 생각해 간도로 돌아감
6. 홍범도와 뜻을 같이 했던 대한 독립군단장 서일 장군은 나머지 병력(3500명)을 이끌고 자유시 안으로 들어감
7. 서일이 대부분의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가자 마자 오하묵(자유대대)이 극동공화국(사회주의 부대) 부대로 편입을 시도함
8. 서일의 밑에 있었던 박창은 장군이 그것을 거부함....거부하자 마자 적군은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서일 홍범도 박창은)을 쫒아 냄
9. 자유시 코민테른(사회주의 연합)에서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을 거북하게 느끼고, 자유시 안으로 군대를 들어오라고 함.
10. 서일과 박창은 등등이 거부하고 , 홍범도와 안무군단은 자유시 안으로 들어감
11. 오하묵의 군대와 소련의 적군이 홍범도와 안무의 군단과 함께 자유시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던 대한독립군단에 융단 폭격을 가하기 시작함
12. 3000여명 (홍범도와 안무의 군단 500명 제외)의 대한독립군단 본군 중 70여명의 사망 1200여명의 부상 , 1000여명의 볼세비키 혁명군 편입.
13. 이 일로 인하여 홍범도 와 안무는 볼세비키 동양비서부 대대 대대장을 역임하고 볼세비키 당원이 됨.
14. 이 일로 인하여 서일 장군 자살, 박창은 총살형, 이범석 장군은 만주로 도망감.
도대체 당신은 어떤 기록을 믿는 건가요???
위 내용의 출처는 어디인가요?? 좃선?? 아니면 어디 일베에서 굴러다니던거??
해방후 일제앞잡이하던 새끼들이 빨갱이 타령하며 다시 나댈때 나온 이야기??
차라리 저는 러시아측 기록을 믿는 겁니다
승리자인 적군이 남긴 공식, 비공식 기록에 홍범도의 독립군 이야기는 찾아도 별로 나오는 것도 없고
심지어 구전된 썰도 없는 상황입니다
자꾸 생각해보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한참 내전중인 상황에서 아군을 돕겠다는 군대가 나타났다?? 이만한 선전거리가 없는데 그걸 내비둬요?? 그들이 바보도 아니고 말이죠
빵빠래 불며 규모와 전과를 부풀려서 떠들고 홍범도를 띄워줘야 정상입니다
제가 적군의 선전부서에 있었으면 이름뿐인 직책이나 장군자리 하나 만들어서 줬을 겁니다
근데 얼마되지 않아 홍범도는 중앙아시아의 작은극장에서 경비일이나 하고 있게 됩니다
2차대전 참전이야기도 있는데 별 내용은 없더군요
일베 자료?? ㅡ.ㅡ;;;
*러시아측 자료
이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극동지부 역사보고서(p298 op.13)와
러시아 군사문화 연구소 (p195 op.11)의 1915~1925년 자료를 보자면
<Опасности корейских вооруженных групп, включая Корейскую армию независимости,
По сути, это сравнимо с волшебной лентой.>
대한독립군단은 마적단에 비견될 정도의 잔혹성과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근해 인민들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음
<Подразделения Ким Чва Чжина, Со Иль, Ли Бом Сока и На Джун Со вернулись в Маньчжурию.
Солдаты, которые не вернулись, были переведены в Вольный город и вернули сданное им после этого оружие.
Среди них Со Иль покончил жизнь самоубийством из-за шока от инцидента в Фри-Сити.>
김좌진 나중소 서일 이범석은 만주로 돌아갔다. 그 중 서일은 자유시 참변으로 인하여 죄책감을 느끼고 자살을 하였다
<Во время инцидента в Свободном городе не было членов Корейского корпуса независимости,
а только демонические банды грабили людей вокруг них.
Хон Бом-до, который очень помог уничтожить Бандитов Демонов, получает должность командира Свободного Батальона.>
자유시 참변 당시에 희생자 목록에는 대한독립군단 인원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처치한것은 마적단 뿐이었다
우리를 도와 마적단을 섬멸하는데 큰 도움을 준 홍범도에게 자유대대 대대장 자리를 하사한다
이상이 러시아 극동 지부 역사 연구소 자료와 러시아 군사 문화 연구소 자료의 함축적 내용인데.....
여기에서 보면 자신들의 자유대대(향후 적군이 됨)은 대한독립군단의 어떤 인원도 죽이지 않았고 , 오로지 마적단과 약탈단만을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반해
우리나라 윤상원 교수의 러시아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논문을 보자면
명확히 우리나라 간도 독립대대가 희생 당햇다고 써 있음 (아래 자료 위키백과 출처)
우선 이 자료의 내용과....러시아 측의 군사 연구 보고서의 자료의 gap 있음
(러시아 측은 자유대한 독립군단의 어떤 희생자도 없었음이었다가 지청천의 군대에서 확실한 증거를 내놓고
따지자 사망 36명 이렇게 발표함....그런데...나중에 항일 독립군단들 대표들이 참석한 증언에 따르면
사망자 200명이상으로 올라가고 전체 피해자는 1500명에 육박함.....)
* 일본측 자료 (한일공동 연구 역사 보고서 , 흑하사변 - 1921년 재내보고서)
<大日本帝国は大韓独立軍団の殲滅を目的として
ロシア帝国内の自由主義勢力に対する支援を惜しまない>
일본측은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로지 대한 독립군단의 섬멸을 목적으로
러시아내 자유세력(백군)의 지원을 도모한다
<魔敵団に応党のコメントを払って、琿春の時のように
白軍と敵軍の不信の種を放つ>
훈춘 사건때 마적단을 매수해 중국인들과 독립군단의 사이를 갈라 놓은 것 처럼
마적단을 시켜 자유진영과 사회진영의 대립을 촉발하라
<自由大隊内の混乱触発、4つ以上の軍閥勢力が右後竹純乱立し、ピア識別厳しい状況
すでに大韓独立軍団本陣内部分裂完了>
4개 이상의 군사 진영으로 나뉜 자유대대에 의해 대한 독립군단 지지 못 받고
양쪽으로 갈라짐. 더 이상 개입 필요없이 분열 완료.
<7月初日、血臭が振動する黒下の姿が描かれるほどの大韓独立軍団の犠牲が把握された
満州に寄生する残りの勢力に対する殲滅が必要と思われる>
7월 초하루, 흑룡강 인근까지 피로 물든 모습이 보여짐. 대한 독립군단이 무너진 상황을 파악함
만주로 돌아간 나머지 대한독립군단의 섬멸을 위시해야 함
이에 대한, 한국측 자료와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결론>
아무리 역사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는 하나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무조건 적으로 독립운동 했다는 거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위인으로 모시는 건.....
마치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서 일본인들이 하는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임....
현재 나온 사실로만 봐도..... 당시 홍범도 안무 등의 세력은 간도참변과 훈춘사건으로 인해서
독립군의 근거지가 없어진 것을 자유시의 자유대대(적군)의 세력과 연합하여 독립군의 근거지를
다시 꾸리려고 했음
(당시 자유대대가 대한독립군단에게 제공한 무기와 탄약을 자신들에게 호위적이라 생각했음, 오하묵과 홍범도의 친분도 한 몫했음)
나머지 서일을 위시한 김좌진 박창은 이범석 등등의 독립군들은 자유대대의 불확실한
스탠스에 대한 두려움과 김좌진이 이미 신한촌(연해주)에서 겪은 일련의 일에 의해서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불신이 있어서 김좌진은 자신의 휘하 군대 500여명을 끌고 먼저 만주로 떠나고
서일 박창은 홍범도의 권유로 자유시로 들어가는데....
자유시로 들어간지 하루만에 대한독립군단(3천여명)이 이미 4개로 분열된 통합 빨치산 부대의 부대 재편에 동원되고
실상 항일운동이 아닌 통합 빨치산 부대의 인원으로 편입될 상황에 이르르자
박창은이 반대를 하고 군사 동원을 거부함
이에 박창은 서일 홍범도 안무까지 모두 다시 자유시 바깥으로 쫒아내 지는데....
당시 러시아 내의 자유시 코민테른에서는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군대는 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논리(아래 내용)
“不偏不義한 魯西亞 同志”를 사령관으 로 하는 “高麗革命軍政議會를 組織하야 軍事上에 關한 萬般을 指揮 統一케하”는 것이라고 했다.때문에 자기들은 “軍政議會의 本部와 某軍隊 駐屯地相距가 一百七八十里 되난지라 食料 及 諸般 供給에 對하야 運搬上 不便이莫大함으로 該軍隊를 軍政議會 近接 村落으로 移屯하라”는 군정의회의 명령이 정당함을 양해하고 “軍政議會 接近 村落에 移居”591)했다는 것이다."
자유시로 무장 해제하고 들어오라고 하였고....이를 거부했던 서일과 박창은 .....
그리고 무장 해제를 하고 자유시로 들어간 홍범도 안무.......
여기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이범석은 몇일 전 떠난 김좌진을 따라 만주로....
결론은 홍범도와 안무가 어떤 스탠스를 취했는지 모르겠으나.....
결국 대한독립군단이 섬멸당했고....(서일은 목숨을 부지하며 겨우 만주로 도망...)
박창은은 자유대대에게 총살형....
홍범도와 안무는 자유대대 대대장 자리를 하사받았고....볼세비키당 당원이 되었다는 거.....
그렇다면 확실히 사실로 인정되는 것 들만 보자면....
1.러시아측 자료의 홍범도와 안무에게 대대장 자리 하사 , 볼세비키 당 당원 추대.....(자유시 내 한인 사회 자료, 레닌 기록)
2.일본측 자료 흑룡강이 붉게 물들 정도의 대한독립군단 섬멸.....(항일 독립단체 증언, 일본측 자료)
러시아 측에서는 대한독립군단을 섬멸한게 아니다...오로지 마적단과 약탈단을 섬멸한거라고 구라 치다가....
결국 자료가 나오니 최소한으로 사망자 36명이라고 이야기 함(지금 이 자료를 근거로 위키백과에 나와 있음)
항일 통합 독립단체의 증언(당시 자유시 내에서 살았던 지청천 부대원의 증언)에 의하면
폭탄및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 최소한 200명이상,
익사 900명이상(흑룡강 인근)
부상자 700여명 이상
자유대대 편입자 900여명
이게 가장 근접한 내용일꺼라는 추측,
3500여명의 대한독립군단 중 500여명이 김좌진 장군과 만주로 돌아 갔고....
나중에 이범석 장군 휘하의 200여명이 또 다시 만주로 간 상황에서....
단순한 계산으로 2800여명의 대한독립군단이 남아 있었는데....
저들의 계산으로는 나머지 병력들에 대한 gap이 워낙 크다.....
도대체 이 자료를 보고도...홍범도는 자유시 참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는것은
일베를 떠나서 정상적인 사고가 맞는지 의심.....
또한.... 서일은 당해 사건에 죄책감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이미 자신과 뜻을 같이한 대다수의
독립군들이 대부분 만주로 돌아왔다는 건 무슨 의미??
님 말대로 홍범도가 대한독립군단 섬멸을 했던 자유시 참변에 영향이 없었을 수도 있음...
그런데...그 이후의 행보를 보자면....그가 과연 자유시 참변과 상관이 없는지??
생각 해 볼 여지가 많음....
우선.....1920년대 자유시 참변 이후 나머지 독립군단 세력은 만주와 연해주로 넘어가거나 중국 내에서 광복군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고 그 모태가 되었음...
그런데.....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이후....아예 역사적 기록에서 거의~~ 삭제가 되다시피
항일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행보였음....
우선은 레닌 시대에 연해주 지방의 코민테른 대표이자 적군의 명예장군으로 임명받았음
1920년대 말부터 ~~ 더더욱 항일 전선이 활기를 띄고 있을때임
그런데...홍범도의 이름은 20년대 말부터는 아예 항일 독립 전선에서 이름이 삭제 되다시피 했음
왜일까???
구전이없다는 건 그만큼 홍범도라는 사람이 당시의 스탠스가 모호하고
다른 독립군단의 스탠스와 반대로 갔다는 반증 아닐까 하는데....
홍범도가 사회주의가 아닌 항일 독립군 대장이라고 한다면....
아직도 나라가 독립을 못한 1920년대말 부터 1930년대까지....러시아 연해주에서
아무것도 안하고...그저 자유대대 명예장군과 콜호즈 지방의 코민테른 대표나 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안가는 행보임
또한,
님이 말하는 홍범도가 중앙 아시아의 작은 극장에서 경비일이나 했던 건
스탈린에게 잘못 보여서(홍범도와 트로츠키의 밀접한 연결성을 이야기 하는 언론도 있음- 한겨레) 중앙아시아로 이주 시켜서 그렇게 된것이고
실상 레닌 시대에는 연해주 남부의 콜호즈 지방의 군대아 코민테른의 대표로 떵떵 거리며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도대체 이상한 자료는 누가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개인이 소수가 뭘 어쩔지해서 판을 뒤집을 수 없죠. 과학이 차이가 큰 무력을 만들어주요. 2차대전 미국이 승리했기에 우리가 해방이 된거죠. 나라를 잃은 과거를 잊지 않는다면 나라의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위주로 가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