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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 08:02
당시 기록
3일 미시(未時)쯤 적이 전라 감영(全羅監營)의 서문(西門)과 북문(北門)을 활짝 열어 놓고 누런 빛깔의 큰 깃발을 세운 다음에
5, 6천 명의 군사가 관군과 싸웠는데 적이 크게 패하여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숫자가 1,000여 명이었다. 적의 괴수
김순명(金順明), 어린 장사 이복용(李福用), 참모(參謀) 선판길(宣判吉), 이른바 곽(郭) 장군, 박장사, 정(鄭) 장군이라는 자들은
모두 죽고 장사(壯士) 전녹두(全祿斗)는 머리뼈가 부서지고 다리를 상하였다.
적은 여전히 성(城) 안에 웅거하여 줄곧 굳게 지켰는데 관군은 더욱 사기를 높여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에 김순명의 머리를 적의 깃발 대에 달아매어 효수하니 남은 적이 크게 놀라서 적들은 패하여 돌아갔다.
8일 진시(辰時)쯤 초토사(招討使)가 군사를 정돈하고 성에 들어가니 성 안의 백성으로서 종전대로 살고 있는
남녀노소가 수만여 명이었다. 노획한 무기는 창과 총이 1,000여 자루, 불랑기(佛狼機) 대포 24문〔坐〕,
납탄 5만 8,000여 개, 화약 1,000여 근(斤)이고 그 밖에 활과 화살, 갑옷과 투구, 칼과 도끼 등속이었다.
모두 다 회수하여 대장에 올리고 방을 붙여서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1894년 4월 27일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직후 도착한 홍계훈
휘하의 경군이 전주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를 잡고 여러 차례
동학군과 충돌하였는데 근대 화기로 무장한 경군의 거센 공세로
전주성의 동학군 주력이 참패를 거듭하고 1000여 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전봉준을 포함한 동학군 지휘관들이 대다수 죽거나 부상을 입는 등의
큰 피해를 입은 뒤에 도주하여 5월 8일에 경군이 전주성을 탈환하였다.
[사견]
이렇게 자국의 병력만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4월 27일 전주성이 함락된지 이틀 만에 고종과 민영준은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군 파병 요청을 예고하고 바로 정식으로 요청하면서 결국 끝나고만
안타까운 역사의 한 획이지 않을까 생각 되어집니다.
동학 아쉬운 혁명임에는 틀림이 없는 개인적인 생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