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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6 10:12
1991년 광주일고에는
고3이던 현 기아 감독 김종국 감독과 함께 팀을 이끌었던 전국구 에이스가 있었습니다.
광주일고 에이스 투수였던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 박재홍 선수 입니다.
광주일고 시절부터 투수, 타자로 맹활약을 펼친후
1992년 프로야구 신인 1차지명에서 연고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연세대학교로 진학합니다.
90년대만 해도 프로야구에서 고졸신인은 매우 드물었고, 대부분 대학교로 진학하던 시대라 .
당시 해태 프런트는 박재홍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하고 1차 지명을 했다고 합니다.
광주일고 시절에는 투타 양쪽에서 모두 훌륭한 재능을 보였으나 (당시 정민철 선수가 박재홍 직구는 전성기 시절 오승환을 보는것 같다고 하내요.)
대학 진학 후에는 타자로 완전히 전향했고. 박재홍 선수가 투수를 하기게는 연세대 투수진이 너무 좋았고. 타자의 재능이 아까웠습니다.
당시 연세대 입단동기가 휘문고 투수 임선동 이였고 연대에는 문동환이라는 걸출한 투수도 있었습니다.
타자때는 아마시절의 투수 때 보다 더 큰 활약을 펼치며 아마 야구단 현대 피닉스와 입단 계약을 맺고.
현대 유니콘스의 왕조시절을 대표하는 스타 되었으며 한국야구의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
그리고 인천 팬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스타 선수가 됩니다.
현대유니콘스가 창단되면서 고졸신인 유격수 박진만과 키스톤 콤비를 이룰 뻔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현대 프론트와 코칭스텝은 주전 2루수였던 김성갑 (유이 아버지) 이 은퇴했으니 그 자리를 연세대 내야수 박재홍으로 대체할 계획이었던 겁니다.
<lg에서 박종호를 트레이드로 데려오기 까지. 현대의 가장 큰 문제가 2루수였습니다.>
1996년 데뷔 첫해에 홈런왕, 타점왕,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 30-30 클럽 가입으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습니다.
신인 시즌 30-30은 세계 프로야구 사상 최초이며 2012년 MLB에서 마이크 트라웃이 30-30을 기록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습니다.
그러나 트라웃도 2012년 신인왕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메이저리그 데뷔는 이미 2011년에 치른 상태였기 때문에
데뷔 시즌만 놓고 보았을 때는 박재홍이 현재로선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각 언론 매체에서 박재홍을 언급할 때마다 '괴물 신인'이라는 말을 수식어로 썼을 정도로 엄청난 신인이었고
그 뒤로 '괴물 신인' 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10년뒤 2006년에 류현진이 물려받게 됩니다.
그리고 1997시즌때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스카우트가 김재박 감독에게 영입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임대라도 안되냐고 부탁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1998년에는 두 번째 30-30 달성과 함께 인천 연고팀 첫 우승을 팬들에게 안기며 도원야구장의 아이돌로 등극했습니다.
홈런 4위, 도루 2위를 기록했는데, 도루 실패가 많아서 그렇지 도루를 2~3개만 더 기록했다면 도루왕에도 등극할 뻔 했던 시즌이였습니다.
2000년에는 구단에 의해 인천을 떠나 연고지를 임시로 수원야구장으로 옮겼는데
이 때 세 번째 30-30은 물론 3할 타율-30개 이상 홈런-30개 이상 도루-100개 이상 타점-100점 이상 득점이라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대기록을 달성했습다.
세 번째 30-30은 박재홍 본인에게도 마지막 커리어이자 현재까지도 많은 선수들이 넘지 못한 유일한 기록이며
앞으로도 한국프로야구 트랜드에 비추어 볼때 달성하기 매우 힘든 기록 입니다. (국내선수 기준. 용병제외)
이후 기아타이거즈 김성한 감독의 적극적인 트레이드 요청으로 인해 기아로 트레이드 되었으나
본인을 데리고 왔던 김성한 감독이 해임되면서 후임인 유남호 감독과의 불화. 기아타이거즈와의 갈등이 심해져
SK와이번스로 트레이드가 됩니다.
당시 SK프론트는 인천야구의 상징 김경기의 선례처럼
SK가 인천 야구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SK 프런트의 마케팅 계획에 따라
박재홍이 선수생활을 처음 시작한곳이 인천이였고 당시 인천의 아이돌 박재홍을 어떻게든 영입을 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와이번스 시절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07시즌 부터
중견수 (김강민이 박재홍을 대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신 우익수로 나오는 비중이 늘기 시작했고,
플래툰 시스템으로 돌려지다가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2007년-2008년 2년 연속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2011시즌 김성근 감독의 장기집권에 피로감이 든 선수단과 분위기 등 좋지 않은 시기에
"김강민의 땜빵이냐" 하는 소리를 했다가 김성근 감독의 경질 직전에 1군에서 말소되었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1할대 타율을 기록한 박재홍에게 구단에서는 코치 연수를 제의했으나 박재홍이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FA 미아가 될 기로에 놓였으나
FA 보상선수, 2차 드래프트 등으로 외야수 자원들이 대거 유출되자 SK에서 코치 연수 제안을 철회 하고 현역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 지속적으로 프런트로부터 2년 연속으로 은퇴 후 코치연수를 제안받았으나
박재홍은 현역 생활 연장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SK는 보류선수 명단에서 박재홍을 제외하며 자유계약선수로 풀어버리면서 sk에서 방출이 됩니다,
하지만 어떤 팀의 입단 제안도 없자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호타준족의 상징이자 황금 92 학번의 기수 중 한 명,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타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은퇴 후에는 해설자로 평가도 상당히 좋아서 10년 넘게 MBC SPORTS+ 해설을 맡고 있습니다.
짧게에 이렇게 흉내내기 힘든 전문성을 가진 분들 글이 더 많아지면 좋겟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