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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10:21
선수 시절 별명인
타격의 달인답게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던 강타자 있었습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강타자였고
아마추어 시절에는 알루미늄 배트 덕분에
장타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 했습니다.
아직도 명 승부로 기억되고 있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의 4번타자
바로 장효조 선수 입니다.
1983년 데뷔 첫 시즌부터 타율1위에
100경기 117안타에 홈런을 18개나 쳤는데 이기록은
1991년 쌍방울의 김기태가 27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신인 좌타자 시즌 최다홈런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인시절 부터 - 1987시즌까지
4년동안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더 놀라운 점은 군복무와 실업야구 경력으로
27세부터 프로야구를 뛰었는데
<프로야구 출범을 1982년에 했기에
그 이전에는 실업야구 팀이나 일본에서 뛰던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해 뛰었습니다.
당시에는 장효조 선수 처럼 20대 후반의 선수는 물론이고
30대가 넘은 선수들이 다수 데뷔를 했습니다.>
프로 생활 10년동안 통산타율이 3천 타수를 넘긴
모든 KBO 리그 선수들 중
두번째로 높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1위 이정후)
또한 장효조 선수의 통산 병살타가 31개밖에 안되었던는데
타석수 대비 병살타가 0.85%로, 1%도 안 되는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투수인
최동원에게 70타수 27안타 1홈런 0.386로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런 화려한 삼성라이온즈의 시절이
1988년 12월, 선수협 파동 직후
삼성구단의 횡포에 의한 보복성 으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가 되버립니다.
롯데자이언츠로 트레이가 된 직후로는
1992시즌에는 삼성에서 하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해 장효조 선수에게는 에이징 커브가 찾아와
시즌 타율 0.265, 54안타라는 프로 데뷔 이래
최저의 성적을 기록을 기록하게 되며 시즌이 끝나자
미련없이 현역 은퇴를 택하게 됩니다.
특이한 점으로는
장효조 선수는 선수 시절의 전성기 대부분을
삼성 라이온즈에서 기록한 삼성의 대표적 스타지만
의외로 롯데 자이언츠에서의 활동 기간도
짧지 않은 편입니다.
삼성에서 9년(선수 6년, 지도자 3년)
롯데에서 10년(선수 4년, 지도자 6년) 동안 있었습니다.
현역 은퇴후에는
바로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로 부임 했고
6년 동안 롯데자이언츠에서 코치로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2000년 시즌에는 고향인 삼성으로 복귀를 하는데
무려 11년 만에 복귀였습니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자
이듬해 다시 퇴진을 하게 되며
10년뒤에 다시 삼성 2군 코치로 복귀를 하게 되며
2011년 류중일 감독 부임과 함께 2군감독으로 선임 됩니다.
2011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30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에 선정되며
은퇴후 최고의 한해를 보냈지만
이 모습이 그가 팬들 앞에서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해 8월 간암 및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결국 1개월후 작고 하셨습니다.
더욱더 아이라니한점은
현역시절 강한면모를 보였던 최동원 선수 마저
일주일뒤 작고 하셨습니다.
최동원 선수는
롯데에서 데뷔했지만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고
장효조선수도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선수가 작고한
2011년 시즌 페넌트레이스 1, 2위는
경상도 연고의 삼성과 롯데 였고.
만약 두 팀이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붙게 되었다면
여러 가지의 관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될
2011년 한국시리즈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삼성의 최동원...
롯데의 장효조...
너무 슬펐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