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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6 10:02
대구중학교에 진학하면서
1학년 2학기 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을 하게된 학생은
야구를 늦게 시작해서 실력이 부족해서 유급을 하게 되고
하루에 네시간씩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지독하게 야구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이학생의 동생이 테니스 선수였는데
동생이 테니스 라켓으로 서브를 넣으면
그걸 야구방망이로 치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3학년이였던 장효조 선수를 찾아가
야구를 가르쳐달라고 조르고 졸라서 배우기도 했습니다.
장효조와 중 - 고 - 대학까지 같은 학교에서 선후배로 지냈고
프로야구 창단 후 삼성에 입단하게 되는 이만수 선수 입니다.
늦게 시작한 야구지만
재능과 실력만큼은 인정을 받아 지역명문인 대구상고로
진학을 하게 되는데
고교 시절에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고.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를 받지 않은 몇 안되는
선수가 됩니다.
경북 야구의 엘리트 코스 그대로
고교 졸업 후 에는 한양대학교로 진학을 합니다.
이만수는 한양대 시절에도
타격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되는데
대학시절 부터 국가대표팀에서 활약을 합니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김응용이 기억하는
이만수 선수는, 박종훈 선수랑 항상 새벽까지 훈련만 하던..
저 둘은 잠도 안자나? 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한양대 졸업 후에는
1982년 삼성에 입단 하며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로만 16시즌 동안 활동을 합니다.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으로
팀의 4번 타자 겸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삼성라이온즈의 최고 스타이자 전국구 스타로 정말 야구를 잘하는 선수 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만수 선수의 포지션이 포수 였는데
역대 홈런왕 3번 , 타격왕 1번, 포수 골든글러브 5번을 수상한
말그대로 레전드 포수 였습니다.
현재까지도 이만수의 선수 시절 수준의 타격 성적을 냈거나
앞으로 비슷한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보이는 포수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만수는 OPS 1.000 이상 시즌이 2시즌
.900 이상 시즌은 10시즌 인데
강민호, 양의지 선수가 타자로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지만
포수 기준 OPS를 10할을 넘기는 대활약을 한것은
양의지 선수도 프로 14년차인 2018년에야
처음 기록한 것이며
강민호 선수역시 2015년 한번 뿐이라
타격 성적만 보면
이만수 선수는 다른 선수와는 아직까지 비교가 불가능 하고
압도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이만수 선수도 1993년부터 에이징커브가 찾아와
삼성은 이만수를 1루나 대타로 출전을 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당시 이승엽을 1루를 키워야 하는 삼성라이온즈의 방침에
설상가상으로 이승엽 선수 의 1루 수비가 상당히 괜찮았던
수준이라
경기를 못나오는 횟수가 누적되면서
1997시즌 후 삼성으로 부터 방출을 당하게 됩니다.
은퇴 후 이만수 선수는 자비를 들여 미국으로
코치연수를 가게 되는데
3년 뒤에는 2000년에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 코치로 부임 합니다.
화이트삭스 코치시절
삼성 라이온즈 계약 파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2003년에 삼성 라이온즈로 부터
코치 및 차기 감독 제의를 받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사직서 까지 제출하며
미국에서의 재산까지 처분하고
한국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에
돌연 삼성에서 코치 제의를 취소해버리는 바람에
실업자가 되버 립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화이트삭스가 이만수 선수의 사정을 이해하고
다시 받아 줬고
2005년도에는 메이저 리그 코칭스태프로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를 합니다.
그리고 2006년 sk와이번스가
이만수 코치를 수석코치로 영입을 합니다.
당시 sk와이번스는 그해 부임한 김성근 감독
계약기간 종료 후
차기감독으로 점찍어 데리고 온 상황이였는데
김성근 감독 부임 후 연속 우승 등 좋은 성적을 거두어
계약연장을 하게 되면서 구단과 김성근 감독, 이만수 코치는 3자간의 갈등을 겪게 됩니다.
결국 2010 시즌에는
김성근 감독과 프런트와 갈등으로
2군감독으로 보직이 이동 되며
2달뒤 다시 수석코치 그리고 이듬해 시즌에는
다시 2군감독 으로 보직이 계속 변경되게 됩니다.
그러던중 2011년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며
8월 감독대행으로 부임을 하지만
당시 김성근 감독의 인기가 하늘로 치솓고 있을때라
상당한 비난을 받으며 남은 시즌을 치루게 됩니다.
시즌 후에 는 감독 대행으로서는 최초로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3년 10억의 계약 조건으로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성공하지만
당시의 삼성 라이온즈를 이기기에는 부족했기에
준우승을 하게 됩니다.
2013 시즌에는 7년만에 가을야구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고
2014 시즌에는 SK 와이번스의 최대강점이었던
팀케미스트리가 처참히 무너져
조인성 선수의 트레이드 파문
루크스캇의 항명사건 등 으로 팀이 망가져 버리게 됩니다.
팀역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결국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아
SK 감독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감독 은퇴 후 에는 감독 능력은
결코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인간'으로서 한 팀을 이끄는 능력..
관리능력 이 너무나 부족했던 감독으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는 라오스 야구 보급과 기부, 봉사활동에만
전념하는 중이며
본인이 감독직 복귀에
굳이 욕심을 내지는 않는 모습을 보이며
현장에 복귀하는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실제로 감독으로서 호불호는 갈리지만
감독 커리어로서 한국시리즈 2회 준우승의 경력과
미국과 한국에서도 코치로서 경험도 꽤나 있기 때문에
타 구단의 감독-코치 제의는 많이 왔지만
전부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현역 시절 '헐크' 같이 무섭게 홈런을 펑펑 치고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최초 100홈런, 최초 200홈런
최초 트리플 크라운 기록 등
많은 1호 기록들을 가지고 있는
이만수 선수의 경기하는 모습이 그립내요